신라는 세 나라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고, 짧은 시간 내 급격하게 성행했다.
뒤늦은 수용은 당연히 먼저 존재하던 조각 양식을 모방하는 것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신라 초기 조각 양식은 고구려, 백제와 흡사하다.
그러나 곧 채 6세기가 다 지나지 않아서 신라만의 독자적인 조각 기법이 생겨났으며 7세기가 시작하면 절정에 이른다.
이를 신라의 세 시기인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상대
제1기
527년 불교가 공인되자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비슷한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 있는 불상이 거의 없어 시대를 반영해 가늠해보자면
대개 북위 양식에 따라 길쭉한 얼굴과 몸을 가졌고 옷자락 끝이 날카롭게 마무리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2기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신라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던 6세기 말 신라의 불교 조각은 이전 시기에 비해 작품의 크기와 개수가 늘어났다.
표현 방식은 더욱 강하고 날카로운 선을 사용한 추상적인 표현이 도드라진다.
거창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데,
보살이 입고 있는 천의가 마치 날카로운 지느러미처럼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제3기
6세기 말에 유행하던 추상적인 표현이 얼마간 계속되다 7세기 후반이 되면 사실적인 모습의 불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불상은 삼화령 골짜기의 무너진 석실에서 발견된 미륵불이다.
앞서 아기 보살이라고 불리는 협시보살 조각이 먼저 발견되었는데,
세 가지 불상을 모아 삼화령 미륵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이 통치하던 644년에 이 불상을 삼화령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적혀 있어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는 한편, 조각에 사용한 기술과 표현 방식을 바탕으로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반도의 지형 특성상 석불의 경우 대개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화령 미륵불은 얼굴 표현이 섬세할 뿐만 아니라 몸의 입체감을 사실적으로 강조했다.
특히 의자에 앉은 특이한 자세는 지금까지 발견된 상대 신라 조각으로서 유일하다.
2. 중대
676년 한반도가 하나의 신라로 통일된 후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를 중대 신라로 구분한다.
특히 8세기 성덕왕이 즉위하며 통일 신라의 국경이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왕권이 강화된다.
당연히 전쟁을 잠시 멈춘 대신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 등 서역과 활발한 교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궁정 중심의 화려한 취향은 당시 조각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불교는 다양한 종파가 함께 대립하는 구조로 화엄종, 법상종, 신인종, 계율종 등 어느 종파랄 것 없이 각자의 힘을 골고루 키우고 있었다.
불교의 수많은 경전 중 하나의 경전을 중심으로 각각 발생했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부처가 각각 달랐다.
예를 들어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섬겼고 법상종에서는 미륵을 섬기는 식이었다.
당연히 저마다 믿는 부처를 경쟁적으로 더 많이 만들어내면서 불교 조각은 전에 없이 번성하게 된다.
그러자 서역 문화의 개방적인 수용과 수많은 불상 제작이 맞물려 불상에 이상적인 신체와 객관적인 미의 기준을 투영하게 된다.
이런 사실주의 양식은 이 시기 활발하게 교류했던 인도 굽타 양식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굽타 양식이란 인도 굽타 왕조와 함께 등장하여 기존 간다라 미술 양식에 인도 고유의 색이 한층 짙게 나타나는 미술 양식이다.
특히 불상을 표현할 때 간다라 미술 양식이 의복의 주름 표현에 집중했다면,
굽타 양식은 몸이 가진 부피감과 굴곡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보는 아름다움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은 이런 중대 신라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완성도가 매우 뛰어난데
화려한 장식 없이 둥글게 떨어지는 어깨와 팔, 두 다리,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통해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위엄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역시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했음에도 얇은 옷의 질감이 잘 표현됐고 옷 밑으로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놀랍도록 부드러워
이 시기 신라의 조각 기술이 정점에 달했음을 느끼게 한다.
3. 하대
제1기
780년 선덕왕이 즉위한 후 신라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한다.
후계를 정하지 못한 채 승하한 선덕왕의 뒤를 이어 김주원이 가장 강력한 후보로 등장했지만,
결국 선덕왕을 자리에 올린 김경신이 원성왕이 되었다.
그러자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이에 불만을 품고 822년 반란을 일으킨다.
김헌창의 난은 중앙군에 의해 진압되긴 했지만 이미 세력이 약해진 왕권 대신 지방을 통치하던 진골 귀족들은 왕위 쟁탈을 계속한다.
신라 해상을 장악한 장보고는 민애왕을 살해 후 신무왕의 즉위를 도우면서 딸을 왕비로 만들고자 했는데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사망하며 이 계획이 수포가 되자 역시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싸움만 일삼는 귀족들이 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은 당연히 수탈이었다.
국가 재정이 함께 몰락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농민들은 세금에 또 한 번 고통받았다.
결국 노비나 도적이 된 농민들이 나라 곳곳에서 봉기하며 하대 신라의 혼란은 심각해진다.
당연히 이 시대의 조각 작품은 발견된 수가 매우 적고,
발견됐더라도 혼란 속에서 언제 어느 때에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파악이 어렵다.
840년 무렵 신라는 잦은 왕권 교체로 인해 오히려 지방 귀족들 간 일시적인 휴전 상태가 되는데
842년 당나라의 불교 탄압과 맞물려 많은 선종 승려들이 신라로 돌아오자 다시 한번 불교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선종은 화엄종을 바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나라가 쇠하는 시기인 만큼 대부분 조각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사실적 표현을 위한 절제가 점점 강해지면서 추상적인 불상의 형태와 도식화된 무늬가 나타나기도 한다.
'동양 미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초기의 회화 (0) | 2022.06.24 |
---|---|
고려의 조각 (0) | 2022.06.18 |
고구려와 백제의 조각 (0) | 2022.05.29 |
고려의 불화와 조선의 불화 (0) | 2022.05.26 |
고려의 불교 회화 (0) | 2022.05.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