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조각은 1170년 무신의난을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지방 세력가인 호족이 세운 나라인 만큼 불상과 사찰 또한 어느 한 곳에 집중되기보다 각 지역 호족들의 후원 아래 전국적으로 성행한다.
1. 전기
태조 왕건은 918년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를 무너트리고 고려를 세운 다음, 936년 견훤의 후백제를 마저 통일한다.
태조 왕건은 불교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왕이었고,
이후 스스로 연호를 붙이며 황제가 되고자 했던 광종이 중앙집권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며 승려를 뽑는 과거제도인 승과를 도입한다.
형식적이지만 승려를 높게 대우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제도였다.
왕이 직접 절을 세울 수 있는 땅을 하사하거나 절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등 고려 초기 불교는 대단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다음 왕인 성종이 즉위하자 완벽하게 왕권이 안정된 상태에서 귀족 중심 사회가 막을 연다.
당시 귀족이 선호했던 불교는 교종인데, 나라를 세우는 데 큰 도움을 받은 선종을 무시할 수 없어 생각한 비책은 종파의 통합이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인 승려 의천이 앞장서서 이 과업을 맡게 되는데
왕족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여 천태종을 만들게 된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합이 아니었기 때문에 훗날 의천이 사망한 후 불교는 다시 각자의 종파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신라 양식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전기에는 사실적이고 종교적인 표현이 유지되는데
대표적인 불상은 강릉 한송사 터에서 발견된 보살상이다.
고려 초 강원도 지역의 대표적인 불상 양식으로 만들어진 보살상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은 하얀 대리석을 사용했다.
높이 솟은 보관과 온몸에 두른 영락은 같은 시기 많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왕자 시절의 석가모니를 본뜬 것이다.
모난 곳이 없는 둥근 형태의 신체, 자연스럽지만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자애로운 표정은
신라 최고의 불상으로 꼽히는 석굴암 본존불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지방 호족을 중심으로 개성 강한 불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논산 관촉사에 있는 미륵보살입상은 전체 높이가 18M가 넘어 돌로 만든 불상 중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지만
몸과 비교하면 머리가 매우 커서 언뜻 보기에는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러나 한송사 보살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에 갑자기 불상을 조각하는 기술이 후퇴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10세기 후반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지방 호족들이 저마다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앞다투어 불상을 제조한 결과이다.
2. 후기
전기를 주도했던 호족 세력은 중기로 접어들자 부귀영화를 대대손손 누리기 위해 음서와 공음전을 만든다.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부모 대의 부와 명예를 곧장 물려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것이다.
고려 중기 무신들은 3품 벼슬까지만 오를 수 있는데 반해 문신들은 1품까지 가능했으며 전쟁터의 최고 지휘관조차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다.
여러 가문이 모여 무리를 이뤘다고 해서 문벌귀족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종 방법을 동원해 더 많은 특권을 독점해서 누리자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았던 무신들이 들고일어나 무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러자 문벌귀족 사회에서 주목받던 이론 중심의 교종 대신 직접 수련해서 깨우침을 얻는 선종이 다시 주류가 된다.
권력을 가진 세력이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 근간인 불교문화에도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전을 읽고 뜻을 찾는 것보다 직접 몸으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무신들에게 더 잘 맞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경전 중심의 교종 대신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무신 정권의 대세가 된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는 반란에 반란이 거듭되며 정권 교체가 잦은 대혼란의 시대로 후대에 남은 조각이 많지 않다.
다소 짧은 황금기를 거쳐 고려 말 몽골의 침략 후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던 고려는 1270년대를 기점으로 원의 간섭을 더욱더 강하게 받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 불상은 대개 단아하고 절제된 미가 돋보이는 귀족적 취향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원나라 양식이 점점 더 짙게 보이는 것 또한 큰 특징이다.
봉림사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3세기 고려 조각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이상적인 신체 비례를 가졌으며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얇고 화려한 의복 대신 목과 양쪽 어깨를 가로지르는 촘촘한 주름이 새로 등장했는데 13세기 고려 불상의 주된 특징이다.
여전히 부드러운 선을 자랑하나 화려함 대신 사실적인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 고려 후기 불상을 묶어 신라와 구분해 신사실주의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4세기가 되면 제작 연도가 확실하지 않지만 13세기와는 몇 가지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불상이 등장한다.
불상의 바탕 형태는 13세기 불상과 거의 비슷하지만 차갑게 굳은 부처의 표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눈과 입술이 모두 일자로 곧고 단단하게 뻗어있어 온화함 대신 엄격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옷 주름 표현의 사실성은 한층 높아졌지만 생략하는 부분 없이 모두 표현하다 보니 다소 복잡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무릎 한쪽에 나뭇잎 모양으로 늘어진 옷자락도 14세기 불상 전반에서 볼 수 있다.
한편 14세기 후반에는 조금 더 둥글고 통통한 신체를 가진 보살 조각이 등장한다.
높이 올린 머리카락과 무릎 위로 흩어진 구슬이 대단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금동보살좌상은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앞선 세대보다 부처를 꾸미는 요소가 조금 더 많아졌다.
원나라의 영향이 강해질수록 불상은 점점 더 화려해져서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제작헀을 것으로 추측하는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은
연꽃 모양 대좌에 올라앉아 섬세하게 조각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온몸에 구슬을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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