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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바로크 미술

by 티모테오92 202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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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가 되자 종교 개혁은 온 유럽으로 퍼져나간다.

루터교로 시작해 다양한 개신교가 등장하며 뿔뿔이 흩어진 신도를 되찾기 위해 
가톨릭은 반종교개혁 또는 가톨릭개혁이라고 부르는 정화 작업을 시작한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모든 가톨릭교회를 감독하기 위한 종교 재판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가톨릭을 대표하는 수도원들은 엄격한 기초 교리를 준수하고자 새로운 수도회를 결성한다.

또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위해 전통적인 미술의 힘을 빌리는데
가톨릭이 가진 위상을 압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웅장한 미술, 바로크 미술이 등장한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활동한 화가인 카라바지오는 바로크 미술의 시작으로 꼽힌다.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인데 르네상스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와 구분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 북부 카라바지오 지역을 따와 불렀다.

가톨릭교회에서 의뢰한 카라바지오의 종교화는 이전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새카만 어둠, 샛노란 강한 빛이 강하게 대조되는 명암을 사용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그림 속에 함께 존재했던 것처럼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 사실적인 표현은 
종교를 미화하지 않되 신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가톨릭의 궁극적 목적인 포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카라바지오의 획기적인 채색 방식은 수많은 당대 화가에게 영향을 끼친다.

특히 인접 국가인 스페인의 천재 화가로 이름을 남긴 디에고 벨라스케스
카라바지오의 특별한 그림에 빠져들어 그의 화풍을 자신만의 것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붓 자국이 가득한 날카로운 채색이 가득하다.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를 보면 망토와 레이스의 거친 촉감이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예민한 교황의 시선과 합쳐져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을 최대한 똑같이 기록하는 초상화의 단순한 기능을 넘어
그림을 봤을 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크 화가의 중요한 의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 후에도 여전히 가톨릭 국가로 남아 있던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다르게
17세기 신교도들이 득세한 네덜란드에서는 바로크 미술도 다른 형태로 발전한다.

네덜란드는 종교 개혁 전 이미 유럽 내 수많은 무역의 거점으로서 개방적인 사고와 진보 성향을 가진 나라였다.

 

종교 개혁을 거치며 힘을 잃은 교회를 대신해 무역, 상업 등 개인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일반 시민들은
특정 화가나 공방을 후원하는 전통적인 방법 대신 작품을 내놓으면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구매하기 시작한다. 

다행히 네덜란드 사람이라면 집, 가게, 공공시설을 가리지 않고 그림에 대한 수요가 높았는데
이 덕분에 풍경화나 정물화 등 이전 시대에서 찾기 힘들었던 다양한 장르를 만나볼 수 있게 됐다.

다양한 문화가 오고 가는 중심지이다 보니 쉽게 보기 힘든 꽃과 곤충, 고급 식기, 유리잔, 악기 등 소재가 넘쳐났고
실제 가지기 어려운 비싼 물건을 그려 소유하고자 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또 꽃말처럼 대상이 가진 숨은 뜻을 고려해 그려진 정물화가 삶의 교훈을 대신하기도 하면서 정물화는 네덜란드 미술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바로크 미술의 국제적인 인기에 힘입어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바로크 미술만의 강한 명암과 현실적인 장면 구성이 나타났고,
궁정 또는 특정 가문의 후원이 아닌 작품에 대한 수요로 전 유럽에 이름을 알리고 부를 쌓은 두 화가가 등장한다.

 

 

 

1. 루벤스

루벤스는 유복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로 자랐다.

이탈리아에서 매너리즘 미술을 배워 인물화를 그리던 스승에게 영향을 받아 
1600년 이탈리아로 떠나 궁정화가로 일하며 큰 성공을 거둔 후 나고 자란 벨기에로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고등 교육을 받은 데다 여러 가지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루벤스는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 화가를 넘어 유럽 대륙의 사교계 유명 인사가 된다.

루벤스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동화 플란다스의 개에 등장하는 제단화, <십자가를 세움> 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정수답게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강한 명암 대비로,
주인공인 예수의 몸에 조명처럼 내리꽂는 빛에 비해 주변 배경은 사람 얼굴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둡다.

또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팽팽하게 당겨진 줄과 잔뜩 힘이 들어간 신체,
대담하게 화면을 가른 대각선 구도가 멈춘 화면 속에서 역동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특이한 점은 이전 세대 제단화가 고통에 찬 예수, 죽음을 맞이한 예수와 슬퍼하는 성모를 그렸다면
루벤스의 그림 속 예수는 살아있는 것은 물론 그의 표정을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는데
가톨릭 개혁을 통해 교회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2.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통해 암스테르담에서 이름을 알린 렘브란트는 부르주아와 귀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부를 쌓게 된다.

공방을 열고 제자를 점점 늘려가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렘브란트는 곧 저택을 구입했고
거대한 캔버스를 사용하며 같은 주제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로서 독보적 위치에 올라선다.

특히 이 시기 렘브란트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있는데 바로 로이텐부르그의 방위대를 그린 <야경>이다.

보통 단체 초상화는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열을 맞춰 세운 사람을 하나씩 자세하게 묘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렘브란트가 그린 야경 속 대원들은 순찰을 위해 대열을 맞추는 순간 멈춰버린 것처럼 그려졌다.

그 덕분에 시간이 흐르면서 렘브란트의 많은 단체 초상화는 당대 생활상을 자세히 엿볼 수 있는 역사화가 된다.

렘브란트는 당시로서 특이하게 자화상에 몰두했는데
훗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기지 못해 공식적으로 파산한 후 그림 속 화가의 눈빛만으로 감정을 전하는 경지에 이른다.

바로크 미술의 정수답게 까만 배경 속 온전히 자신의 감정에 집중한 이 그림은
한 때 거친 채색과 일반적이지 않은 모델의 자세 때문에 질 낮은 그림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에서 낭만주의 미술이 힘을 얻게 되며 렘브란트의 그림이 세상에 다시 한번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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