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베네치아 르네상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터전을 옮겼다.
15세기 피렌체에서 16세기에는 로마, 마침내 베네치아에 도착한다.
그림이지만 조각처럼 부피감이 느껴지는 그림, 또 역사적인 주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피렌체나 로마와 달리
바다와 가까운 베네치아 출신 화가들은 마치 물에 반사된 빛처럼 강렬한 색, 질감, 전체적인 분위기에 집중했다.
베네치아 화파의 시작을 알린 것은 조반니 벨리니였다.
아버지가 이미 유명한 화가 야코포 벨리니였고, 형인 젠틸레 벨리니가 큰 규모의 주문을 여러 번 맡아
가족의 이름을 딴 공방을 운영했을 만큼 이름난 화가 집안이었다.
조반니도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의 궁정화가로 일하며 초상화를 주로 그렸는데
계란을 풀어 물감으로 사용하는 템페라 대신 기름을 사용하는 유화 기법을 만나면서 새로운 작품을 시도한다.
유화가 가진 장점은 템페라에 비해 물감이 천천히 마르고 색을 더 자연스럽게 번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조반니의 새로운 그림은 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림 속 배경이 전체 이야기에 맞춰 어울리는 색으로 칠해지는 대신 시간과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기의 색을 갖게 됐고
종교적 이야기 속 한 장면을 주제로 삼는 대신 거기에 넓은 시야의 자연 풍경과 분위기가 가진 암시를 더했다.
이탈리아 미술사에서 동이 트기 직전 새벽을 묘사한 첫 번째 화가로 알려졌으며,
특유의 부드럽고 가벼운 분홍색은 벨리니라는 이름을 붙여 사용하게 됐다.
베네치아 미술은 조반니의 뛰어난 제자 두 사람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다.
첫 번째는 카스텔프랑코 출신의 조르조, 조르조네다.
조르조네의 초기 작품인 카스텔프랑코의 성모는 각각 좌우에 성자와 가운데 높은 곳에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가 앉아있다.
그림 속 장식적인 삼각형 구조는 베네치아 미술의 대표 구도가 됐다.
특히 베네치아를 방문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만나면서 배경의 경계가 불명확한 스푸마토 기법을 유용하게 사용하는데,
조르조네의 대표작인 <폭풍우>는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해 물감처럼 번지는 하늘을 표현했다.
하늘 가운데 가득 낀 먹구름과 번개, 오른쪽과 왼쪽 아래에 꼭짓점이 되어 삼각형을 이룬 남녀를 두고
미술학자들은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은 없다.
초상을 중요하게 생각해 인물을 강조하고 배경을 깊게 묘사하지 않았던 피렌체 미술과 달리
고즈넉한 시골 풍경과 도시가 공존하는 특이한 구조는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조르조네는 안타깝게도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을 피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하지만 베네치아 화풍을 명확하게 하나의 사조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는 뜻에서 큰 조르조라는 뜻의 조르조네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화가는 티치아노다.
티치아노는 앞선 조르조네가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을 베네치아 화풍으로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스승인 조반니에게 배운 유화 기법을 자기만의 것으로 한단계 발전시킨다.
1518년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제단화 <성모의 승천>을 맡아 그렸는데
완성된 작품은 얼마나 혁신적이었던지 주문을 의뢰한 성직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이 그림에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동시에 티치아노가 가장 사랑한 주홍색이
베네치아 화파의 특징인 삼각 구도를 이뤄 그림을 아주 강렬해 보이게 한다.
자칫 땅과 구름 위, 더 높은 하늘이 삼등분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그림에
성인의 머리에 두른 후광 대신 배경 전체에 황금빛을 사용해 통일감을 준 것도 색다른 시도였다.
특히 티치아노를 포함한 베네치아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처럼 나무판에 유화를 그리지 않고 돛을 만드는 천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격도 나무판에 비해 저렴하지만, 유화 물감이 잘 스며든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해상 무역이 잘 발달한 도시였기 때문에 좋은 품질의 유화 물감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화풍을 구축할 수 있었던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화파의 신세대로서 그림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결국 그 명성이 스페인까지 닿아 그림을 그리던 도중 스페인 왕이 직접 떨어트린 붓을 주워줬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한편 티치아노는 여성 누드화를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는데
역사가들은 당시 베네치아 항구마다 뱃사람이 많고, 그에 따른 매춘업이 성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년에 가까워지면서 티치아노는 점점 더 색채 미술에 몰두한다.
캔버스는 더 이상 채색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물감을 입히는 중 그림은 수시로 바뀌며 완성됐다.
붓 자국이 점점 거칠어지며 추상화에 가까운 이미지를 갖게 되는데
티치아노의 이런 특성도 마찬가지로 다가올 매너리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북유럽 르네상스
15세기 초까지 현재 벨기에 땅인 플랑드르 지방의 미술은 이전 시대의 고딕 양식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도시 국가가 한창 발전하고 있는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성당, 시장, 시청 등 공공건물이었기 때문에
회화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이 아직 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말이 되면 플랑드르 미술의 중심은 독일이 되고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플랑드르 지방 고유의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는 죄를 짓고 돈을 내면 벌을 사해주는 면벌부를 강하게 비판했고
라틴어로만 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일반인들이 더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도우며 새로운 종교인 루터교, 즉 신교를 만든다.
그러자 대중적이고 시민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한 이탈리아와 달리
독일 미술가는 시대 상황을 반영해 정치적, 종교적 메시지를 가득 담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작품이 빈틈없이 꽉 찬 구성에 자칫 우울해 보이기까지 하는 차가운 색채,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얀 반 에이크는 유화의 보급과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얀 반 에이크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은 묘연하지만
북유럽 화가 중 인물화의 거장을 꼽자면 얀 반 에이크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북유럽 르네상스 특징 중 하나인 꽉 찬 구성에 수많은 상징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원래 결혼식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지만 당대 양식과 차이가 있어 부부 초상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아르놀피니 부부가 아닌 측근이라는 해석 등 아직도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림 속에 거울을, 거울 속에 화가를 담은 놀라운 구성은
이후 17세기 스페인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등장할 때까지 그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대단한 발상이었다.
정물 표현이 완성 단계에 이르자 얀 반 에이크는 플랑드르 풍경화로 분야를 넓힌다.
베네치아 화파가 사실적인 배경으로 고유 양식을 발전시킨 것처럼
얀 반 에이크도 운하가 발달한 플랑드르의 실제 풍경을 배경으로 삽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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