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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매너리즘 미술

by 티모테오92 2023.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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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전성기가 끝나고 바로크 미술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매너리즘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이 생겨난다.

양식의 이름은 이탈리아 미술사학자인 루이지 란지가 처음 사용했으며 
르네상스 전성기 미술을 따라 하기만 했다는 비판적 입장이 담긴 이름이었다.

하지만 매너리즘 미술가들이 르네상스 미술을 따라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중 최고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세 사람은
이름이 곧 하나의 양식이었을 만큼 관찰과 묘사, 수학적 계산에 있어서 완벽한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많은 화가가 세 사람의 작품을 미술의 정석이라고 생각했고
이전 세대가 눈으로 본 것을 똑같이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그 노력의 결과물인 대가의 작품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매너리즘 미술은 단순히 르네상스 전성기 작품의 모사를 가리키는 말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일단 기법을 모두 체득하자 선대 미술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개인이 느낀 바를 그림에 담기 시작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 이 시기 작품에 집중한 독일 역사가들이 후기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사조 용어를 제시한다.

역사적으로는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 후반까지 한데 묶어 매너리즘이 등장한 사회적 배경을 설명한다.

 

 

 

가장 먼저 끝없는 태평성대를 누릴 것 같았던 이탈리아에서 긴 전쟁이 시작됐다.

르네상스 시대 중심지로 유럽 왕국 중 가장 번성한 이탈리아반도를 두고 
독일-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66년간 다섯 번이나 격돌했다.

맨 처음 이탈리아를 침략한 것은 발루아 왕조의 샤를 8세였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 사망하자 프랑스 옛 왕조가 다스리던 땅이라는 명분을 세워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이끌고 아주 쉽게 이탈리아 전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 군대는 콘도티에레, 즉 직업 용병과 계약을 맺고 도시 국가의 치안과 전쟁을 일임했는데
직업으로서 방어적이고 계산적일 수밖에 없는 콘도티에레의 전투 방식에 비해
나라와 국왕을 지키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프랑스 군대는 정복 전쟁에 걸맞게 빠르고 무자비한 싸움을 벌였다.

국가 안보가 위험에 빠지자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다.
최신 대포로 무장한 왕의 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이탈리아 용병들을 보며 
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 유명한 <군주론>과 <전술론>을 썼다.

이탈리아의 미래를 위해 군사 개혁이 꼭 필요하며 돈을 주고 계약하는 용병 대신 마음에서 우러나와 싸울 수 있는 정식 군대의 창설,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기는 결전을 강조했다.

한편 샤를 8세의 원정에 자극받은 스페인, 독일 등 유럽 강대국들이 속속 이 전쟁에 참가한다.

1559년까지 유럽 지중해에 위치한 나라 중 한 번 이상 참여하지 않은 국가가 없을 만큼 전쟁의 승패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구심점이 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세력을 잃고 쫓겨나는 등 이탈리아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사이 폴란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새로운 사실을 증명하기에 근거가 턱없이 부족했음을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인정했지만
오랜 세월 하나의 진리라고 여겨진 천동설에 제기된 의문은 그 자체로 큰 충격이었다.

 

 


우주의 중심인 지구, 지구의 중심인 교회도 곧 영원할 것만 같던 힘을 잃었고 
사람들은 부패한 교회 대신 새로운 종교를 찾아 종교 개혁을 시작했다.

결국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덕목인 조화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불안정한 사회 흐름 속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한 세기에 걸친 변화와 불안은 미술 기법에도 반영됐다.
완벽함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예술가는 완벽을 깨트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전성기 매너리즘 미술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가진다.

 

 

 

a. 그림 속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듯 부자연스럽지만 정교한 묘사
b. 자연스러움 대신 강조된 장식성
c. 날카로운 
d.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 대신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e. 빈틈없이 가득 채운 화면
f. 수직과 수평으로만 이루어진 안정적인 구조 대신 기울어진 축을 다양하게 사용한 복잡한 구조
g. 인체 비례의 황금비 대신 가늘고 길게 늘어난 몸
h. 비현실적인 색채, 주로 어둡고 차가운 느낌의 색을 사용
i. 어둡고 극적인 감정 표현
j. 자연스러운 빛이 아닌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광원

 

 

 

매너리즘 미술은 피오렌티노와 파르미지아니노가 활동하는 1540년대까지 내려와
화면 가득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인물들과 어두운 배경, 심하게 왜곡된 비례가 두드러진다.

특히 파르미지아니노의 목이 긴 성모 속 10등신에 가까운 성모, 천사와 비교해도 거의 비슷한 몸집을 가진 아기 예수는 

가늘고 길게 늘어져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 매너리즘 미술의 극단적인 방향을 잘 보여준다.

 

 

 

한편 르네상스 본 고장인 피렌체에서 시작한 매너리즘 미술은 베네치아와 스페인에서 꽃을 피운다.

베네치아 매너리즘 화가 틴토렌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전혀 다른 최후의 만찬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림 속 주인공인 예수가 가운데 앉아 있지만 식탁은 불안하게 대각선으로 놓여 있으며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나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특히 빛이 거의 사라진 공간에서 예수의 후광만이 밝게 빛나며 사람들의 얼굴을 무섭게 비추고 있는데

이탈리아 내륙의 매너리즘 미술이 형태적 요소에 초점을 맞춘 대신 빛과 색을 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 베네치아 매너리즘 미술의 특징을 볼 수 있다. 

크레타섬 출신으로 스페인 매너리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엘 그레코는 어느 화가에게서도 찾기 힘든 독창성을 보여준다.

 

수많은 후기 르네상스 특징 중에서 날카로운 선과 장식성이 가장 잘 느껴지는 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
20세기 미술사학자인 막스 드보르작은 엘 그레코의 작품이 추상 미술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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